그을린 자리
당신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날씨는 어떤지, 인터뷰 전까지 뭘 하고 있었는지 사소한 것까지 다 궁금하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니까.
나는 지금 뉴욕 브루클린 내 방에 있다. 바깥 공기는 차갑지만 밝은 햇살이 내리 쬐고 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날씨다. 오전 9시가 막 지났고, 즐겨 가는 카페에서 살구잼을 바른 크루아상과 카페라테 한 잔을 사 왔다. 이걸 먹으면서 인터뷰에 응할 생각이다.
<뉴욕타임스>, <타임>, <사이트 앤 사운드> 등 유수의 매체와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이 꼽은 2022년 최고의 영화이자, 지금 막 발표한 제95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당신의 영화 <애프터썬>의 폴 메스칼이 남우 주연상 후보로 지명된 직후다. 기분이 어떤가.
지난해 5월 칸 국제영화제 비평가 주간에서 첫 프리미어를 한 이후 이 영화에 일어난 일은 놀라움 그 자체다. 해가 바뀌어도 여전히 전 세계의 관객과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폴 메스칼의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 후보 지명은 기쁜 일인 동시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거대 자본이 투입되지 않은 소규모 영화가 주목받았다는 사실이 자랑스럽다.
영화를 보자마자 특별히 친밀하지 않은 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물었다.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애프터썬>은 그런 마음을 먹게 하는 영화다.
내 첫 번째 단편 <튜즈데이>를 끝내고, 아직 뭔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영화 학교를 마칠 즈음이었는데, 우연히 들여다본 오래된 앨범에서 아빠와 내가 함께 찍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청소년기와 부모님에 관한 기억, 특히 아빠에 대해 여러 감정이 일렁이더라. 당시 사진 속 아빠의 나이와 내 나이가 비슷하다는 것도 좀 남다르게 다가왔다. 기억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 기억을 파고들며 이야기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개인적이고 감정적으로 변화해 갔다. 아주 천천히.
흔히 ‘자전적 이야기’라고 하지만 나는 그 표현을 의심한다. 당신 역시 여러 인터뷰에서 ‘정서적으로 자전적인emotionally autobiographical’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당신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 또한 자전적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와 존재가 무엇인지 의심한다. 단호히 규정짓는 표현이라는 점에서 받아들이는 이를 혼란스럽게 한다고 생각한다. <애프터썬>은 나의 사적인 기억과 경험의 뿌리에서 출발했을 뿐 다큐멘터리가 아닌 픽션 영화다. 다만 이 영화가 지닌 정서는 온전히 내 안에서 나온 것이기에 ‘정서적으로 자전적인’이라는 표현이 적합하다.
지난 기억을 다시 꺼내는 일에 관해 묻고 싶다. 영영 묻고 싶은 기억이 있는가 하면, 반드시 꺼내야 하는 기억이 있는 법이니까.
스크립트 작업에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초고는 그저 아빠와 딸의 휴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처음엔 그런 막연한 이야기였는데 명확한 아우트라인을 만들기 위해 내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고, 기억과 회상이야말로 이 영화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과거를 통해 변화한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 현재에 기록한 관점을 다루기로 한 것이다.
기억, 시간, 슬픔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거칠게 찍힌 캠코더 영상을 활용한 방식이 흥미롭다. 시간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아버지와 딸의 관계와 행동을 이해하는 데 새로운 시점을 제시한다.
내 세대에게 홈 비디오의 이미지와 기술은 아주 흔한 수단이다. 당신 말대로 홈 비디오는 미학적 관점을 표현하기에 흥미로운 도구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그 지점을 넘어서고 싶었다. DV 카메라로 찍힌 이미지는 매우 직접적인 시점이다. 렌즈와 뷰파인더를 통해 바라본 이미지는 마치 한 개인의 눈에 담긴 기록과 같다. 누구나 하나씩 가지고 있는 지난 시절의 홈 비디오를 다시 볼 때 그리움과 위안을 동시에 느끼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의 컬러 그레이딩에도 관심이 많다. 1990년대 컬러 사진의 경향이 반영된 이미지는 하염없이 아름답고 어딘지 서글프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당신의 말이 정확하다. 우리는 1990년대 컬러 필름 사진의 톤 앤 매너를 표현하기 위해 컬러 그레이딩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촬영감독 그레고리 오케와 1990년대에 찍은 우리의 휴가 사진을 한데 모아 강력한 레퍼런스로 삼았다. 나 또한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튀르키예에서 여름휴가를 보낸 적이 있는데, 그때 찍은 사진들이 특히 많은 도움이 됐다. 딥한 블랙, 푸른 계열의 튀르쿠아즈 컬러를 균일하게 표현했고, 피부 톤은 마젠타에 가깝게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1990년대 컬러 사진을 레퍼런스로 삼았지만 빈티지하거나 레트로한 인상은 들지 않는다. 차라리 오늘과 같은 느낌이라는 표현은 어떨까.
그 지점이 중요했다. 현재성을 잃고 싶지 않았다. 영화 속 배경은 현재가 아닌 빛바랜 과거일지라도 영화는 지금 이 순간의 모습처럼 보이길 바랐다. 그저 지나가고 잊힌 과거가 아니라 사는 내내 돌아볼 가치가 있는 소중한 기억이니까.
아버지와 딸의 휴가를 회상한다는 이야기는 자칫 클리셰와 노스탤지어에 빠지기 쉬운 소재라고 생각한다. 그 함정에 빠지지 않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우려와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매 순간, 매초 신중하게 고민했다.(웃음) 각본을 쓰는 과정에서부터 로케이션 선정, 촬영과 카메라의 위치, 편집까지. 어떤 장면은 아주 살짝 클리셰처럼 여겨지는 부분이 있지만 그건 꼭 필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솔직해진다면 클리셰의 함정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아무튼, 진부함과 감상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는 필사의 노력을 다했다.
음악 또한 인상적이다. 특히 섬광처럼 반짝이는 마지막 시퀀스에 퀸의 ‘Under Pressure’가 길게 흐를 때, 아버지와 딸이 끌어안고 춤을 출 때, 긴 호흡으로 장면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 이 영화를 오래도록 아끼고 지지하기로 마음먹었다.
정말 고맙다. 나도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장면이다. 맨 처음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다른 형태의 엔딩은 생각할 수 없었다. 가사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한 채 막연하게 사용하고 싶던 노래인데, 결과적으로 영화의 내용과 정확히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한다. 놀라운 우연이자 내 무의식의 특별한 능력이 작동한 것 같다.
<애프터썬>은 당신의 첫 장편 데뷔작이다. 처음에만 나올 수 있는 에너지와 용기를 생각하니 궁금한 게 있다. 지금의 당신을 만든 다른 작품에 관하여.
나에게 영감과 영향을 준 작품은 너무 많아서 다 말하기 곤란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벽에 두 영화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데, 하나는 테런스 데이비스의 <먼 목소리, 조용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존 카사베츠의 <영향 아래 있는 여자>라는 것은 말할 수 있다. 질문을 바꿔 죽기 전까지 평생 찾아볼 것 같은 감독의 이름을 말하는 편이 낫겠다. 샹탈 아커만과 클레르 드니, 셀린 시아마 같은 감독의 작업은 내 영화와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거창한 바람이지만 <애프터썬>도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영화는 삶을 통째로 뒤흔들거나 바꿔놓는다. 당신이 굳게 믿는 영화의 힘은 무엇인가.
누군가는 사진으로, 누군가는 그림으로, 누군가는 글로 자기 생각을 표현한다. 그것들의 힘도 대단하지만 영화만이 지니는 독특한 매력은 이미지와 사운드, 연출 등 서로 다른 레이어가 모여 예상치 못한 작용을 한다는 점이다. 그 어떤 메커니즘으로 특정하거나 형용할 수 없던 감정이 영화 속에서 표현될 때, 그걸 목격할 때 나는 영화의 힘을 느끼고 믿게 된다.
Text Choi Jiwoong
Art Lee Jae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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