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w Up
Text Ji Woong Choi
Photography Seung Woo Back
언제, 어떤 계기로 북한에 다녀오신 거죠?
2001년이었어요. 김대중 정부 시절 햇볕정책으로 남과 북이 꽤 잘 지냈잖아요. 특히 문화 예술 분야의 교류가 지금 생각해보면 파격적일 정도로 활발하던 시절이죠. 어떤 특별한 계기나 목적이 있던 건 아니고 단지 북한에 가보고 싶었어요. 잘 하면 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당시 친구가 통일부에 근무했거든요. 북한에 갈 방법을 물었죠. 저는 사진가니까 사진기자로 가는 게 가능성이 높을 거라고 하더군요. 마침 이영희 디자이너가 평양에서 패션쇼를 앞두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바로 그의 매장으로 달려갔어요. 나는 사진 찍는 사람이고, 보수는 일체 받지 않아도 상관없으니 데리고만 가달라고 부탁했죠. 처음에는 뭐 이런 이상한 사람이 있나 생각했을 거예요. 일주일 정도 매일 찾아가서 버텼죠. 원래 내정된 사진기자가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못 가게 된 거예요. 그 빈자리에 제가 들어가게 된 거죠.
평양에는 어떤 경로를 통해 들어가셨나요?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들어가는 고려항공을 탔어요. 인원은 40~50명쯤 됐고요. 그중 모델이 20여 명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출발하기 전 3일 동안 통일부에서 교육을 받았어요. 안보 교육이죠. 뭘 하면 안 되고, 어떻게 하면 위험하고 그런 교육을 받으니까 그제야 평양에 간다는 것이 실감 났어요. 동아일보, 중앙일보, KBS 기자도 있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북한 입장에서 기자들은 특별 관리 대상이었던 것 같아요. 굉장히 철저하게 관리를 받았어요. 저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으니까요.
사진기자로서 제 역할을 수행한 거네요.
맞아요. 그런데 찍고 싶은 걸 마음대로 찍을 수 없었어요.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장소만 갈 수 있었고, 그 안에서도 또 보여주고 싶은 부분만 촬영을 허락했거든요. 그때는 필름을 썼으니까요. 35mm 필름 한 롤이 서른여섯 장이잖아요. 나를 전담하는 북한 관리인이 온종일 찍은 필름 수를 체크해요. 일과가 끝나고 고려호텔에 돌아오면 필름을 전부 회수해 갔어요. 그들이 직접 현상을 했고, 다음 날 아침 방으로 현상한 필름을 가져다줬죠. 어떤 필름은 서른여섯 장이 온전하게 돌아오기도 해요. 근데 어떤 필름은 5~6장만 누더기처럼 남고 나머지는 없었어요. 검열에 걸린 거죠.
사라진 필름은 어디로 갔을까요?
아마 버려졌겠죠. 이건 사진가의 입장인데요. 그렇게 검열에 걸려서 잘려나간 필름이 정말 많을 거잖아요. 그걸 어딘가에 잘 모아두었다면 진짜 좋은 작업이 될 것 같긴 해요. 평양에 머무는 3주 정도의 기간 내내 찍은 사진은 저의 시선이라기보다 그들에게 통제된 사진인 거잖아요. 양은 꽤 됐는데 돌아와서 보니 재미가 없더라고요. 쓸모가 없어 보였어요. 2001년 평양에서 찍은 사진은 공개되지 않고 창고에서 잊혀져갔어요.
평양에 머문 3주 동안 주로 뭣하며 지냈나요?
관광요. 매일 관광만 했어요. 이영희 디자이너의 패션쇼를 비롯한 행사는 이틀 정도였거든요. 나머지는 준비 기간이었어요. 함께 평양에 간 인원 중에는 북한에 이런저런 투자나 지원을 한 기업인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대체로 북한이 고향인 사람이었는데요. 그들을 위한 관광 코스가 짜여 있었고, 저는 그 일행이 됐어요. 그들은 꿈에 그리던 고향에 오게 된 거잖아요. 모든 순간을 감격해했어요.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다가 어머니 생각이 난다며 우는 사람도 있었어요. 그분들의 심정이 뭔지 이해는 하지만 저로서는 당황스러운 순간도 많이 지켜봤죠. 모든 상황이 어떤 의미에서 약간 블랙코미디 같기도 했어요.
<트루먼 쇼>처럼요?
맞아요. 이념이나 정치나 그런 문제를 떠나서 아마 평양은 전 세계에서 가장 멋있는 도시일 거예요. 아주 매력적이고, 아주 이상한 세트장 같았어요.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고, 이건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인데 평양 사람들 모두 그 세트장을 누비는 배우 같았거든요. 실제로 평양에는 아직도 아무나 못 산다고 하잖아요. 특별한 사람만 사는 도시거든요. 특별한 충성심을 갖춘 사람들요. 저는 사람을 기억할 때 얼굴보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와 뉘앙스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게 각인되면 얼굴이 자연스럽게 따라와요. 근데 평양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 상황, 분위기는 아직도 생생한데 그들의 얼굴은 단 한 명도 선명하게 떠오르질 않아요. 모두 같은 대사를 외웠으니까요. 제가 평양에 머무는 동안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뭔 줄 알아요? “평양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우리는 행복합니다”, “우리만이 미국과 맞설 수 있습니다”였어요. 어린이든 노인이든 전부다요. 역시 내 추측이긴 하지만 감시와 통제를 넘어 도청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도 여러 번 받았고요. 그때부터 좀 무서워지더라고요.
2001년 평양에서 찍은 통제된 사진은 2005년
말한 것처럼 그 사진들은 제게 별 의미가 없었어요. 찍고 싶은 걸 자유롭게 찍은 것도 아니고, 그마저 검열당한 사진들이니까요. 사진가로서 그 사진으로 뭘 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아주 우연한 계기로 영국에서 전시를 봤어요. 프랑스 다큐멘터리 작가가 평양에서 찍은 사진을 전시한 건데요. 꽃을 들고 있는 여성을 찍은 사진이 있었거든요. 낯이 익었어요. 2001년 내가 찍은 여성과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더라고요. 그 둘이 정말 동일인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나는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어요. 집으로 돌아와서 평양에서 찍은 사진을 다시 꺼내 보기 시작했어요. 찍을 당시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하고, 작업으로서의 가능성이 느껴졌어요. 필름의 어느 한 부분을 확대해 보기 시작했더니 전혀 다른 이미지와 의미가 생기더라고요.
필름을 확대하다 보니 초점이 나가고, 프레임이 뒤틀리고, 입자는 튀기 시작하죠.
처음에 40장 정도의 사진을 프레이밍해 전시했어요. 어떤 식으로든 내러티브를 만들고 싶었거든요. 내게 팩트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어요. 나는 기자가 아니라 작가니까요. 내가 사실을 증명할 이유나 의무는 없거든요. 내 맘대로 상상하고 이야기를 만들기에 블로 업이라는 기법은 중요하고 요긴했죠.
완벽하게요. 이 작업 이전, 평양에 갔을 때만 해도 저는 전통적인 사진가의 입장이었어요. 남들과 다른 사진을 찍고 싶었고, 소위 말하는 찰나를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사진이라는 통로로 뭔가 거창한 걸 증명해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거의 강박이었죠. 전통적인 사진의 입장이 발견이라면,
남과 북의 경계가 다시 유연해지고 있어요.
정말 갑자기 그렇게 되네요. 오늘 이야기는 전적으로 내 기억에 관한 거잖아요. 나는 여전히 북한이라는 체제, 평양이라는 도시를 폐쇄적으로 기억하고 있어요. 근데 내 기억과 판단이 정확한 사실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아마 나는 평양과 그곳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었을 거예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북한에 대한 수많은 선입견을 품고, 배우며 살았으니까요. 어쨌든 북한의 변화, 이런 부드러움은 당연한 걸로 생각해요.
한 번씩 그 도시가 생각나세요?
평양 시내를 그림으로 그리라고 하면 그릴 수 있을 정도예요. 그만큼 선명해요. 평양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도시였어요. 최소한의 단어로 딱 필요한 말만 해요. 평양의 건물이 유난히 선명한데요. 자본주의의 쓸모없는 치장이 없는 건물 양식이니까요. 그 도시의 풍경, 건물의 레이어가 사진가인 내 눈에 아주 강하게 남아 있나 봐요.
그러고 보니 평양의 이미지와 백승우의 이미지가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막연하지만요. 동의해요. 그때의 자극이 사진가인 내게 아직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