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역시 언어.

ART

JESSE CHUN : SECRET LANGUAGE

Text Kwon Sohee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이것 역시 지도>를 위해 서울을 오랜만에 찾았다고요. 얼마 만인가요.
6년 만이에요. 너무 오고 싶었는데 그동안 못 왔어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서울에 몇 달 머물렀는데, 너무 좋았습니다. 여러모로 제게 특별한 곳이라 내년부터는 서울로 스튜디오를 이주해 서울과 뉴욕에서 함께 활동하려고요.

반가운 소식이네요. 뉴욕, 한국, 홍콩, 캐나다··· 여러 문화권이 교차하던 작가의 유년기가 어땠는지 먼저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저는 한국에서 태어나서 열한 살 정도까지 서울에서 자라다가, 가족과 홍콩으로 이민을 갔어요. 뉴욕과 토론토는 제가 그 이후에 머문 곳이에요. 제 유년기에 관한 기억은 거의 서울과 관련한 건데, 어릴 때 할머니와 절에 다녔던 일이 많이 떠오르네요. 스님들과 놀았던 기억 같은 것요.(웃음) 제가 이민 갔을 당시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였어요. 같은 아시아인데 백인들이 지배하고 있다는 게 무척 혼란스럽더라고요. 그곳에서 식민주의colonialism를 실제로 경험한 거죠. 그리고 영어를 배우게 되면서, 일찍이 언어란 단순히 소통을 위한 도구만이 아니라 세상의 여러 사회·정치적 틀과 이념에 엮여 있는 것인 걸 알았어요.

홍콩에서 머문 기억이 강렬했군요.
아직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던 날을 잊지 못해요. 홍콩 반환식의 밤이요. 하루아침에 한 나라의 정체성이 바뀌던 그 밤, 몇 시간 동안 미치게 터지던 불꽃과 음악 같은 것···, 모두 생생하죠.

작업 다수에서 작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나 갈망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어요. 예술가가 된 이유와 관련 있을까요.
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제가 놓인 문화적 경계보다는 더 철학적인 갈망에서 비롯된 것 같아요. 국경 너머의 보다 실존적인 질문들이요. 처음엔 저도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사람인지 몰랐지만, 무언가 말하고 싶다는 사실을 깊게 느꼈어요. 비주얼 아트는 그런 제게 가장 적절한 소통 방식이었고, 그러다 예술가가 되었네요. 제 작업에 대해 파고들수록 나 자신과, 시간과, 세상을 조금씩 더 친밀히 보게 됐어요. 그건 마치 사람들과 섬세한 비밀의 언어Secret Language를 나누는 일 같다고 생각합니다.

첫 언어에 관한 작가의 아주 개인적인 기억이 궁금해요.
제 첫 언어는 한국어예요. 유년기 때의 한국어와 한국 민속, 고전문학에 대한 기억들이 아직 제 내면에 맴돌고 있는 걸 느껴요. 그런 요소들이 작업에 담기기도 하고요. 아주 어릴 때 이야기인데, 제가 글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빨간 격자 원고지에 직접 소설을 써서 엄마 아빠께 계속 선물을 했대요. 누가 원하지도 않은 선물인 데도요!(웃음) 그래서 종종 당황하셨다고. 아마 그렇게 어린 시절부터 언어가 선물이 될 수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한 것 같아요.

이후 다양한 언어를 체화했죠. 작가가 몸소 경험한 언어들과 문화적 권력 사이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어요.
무엇보다 다양한 나라에서 자라면서 세계 공용어인 영어가 식민주의적 유산을 펼치는 데 쓰인 도구인 걸 알았어요. 세상의 공식적인 역사, 서류와 서사는 아직도 영어로 기록되고 번역되니까요. ‘이 번역이 누구를 위한 것일까?’라는 질문을 서구권에 살면서 제 자신에게 많이 했어요. 제가 가장 오래 살았던 미국에서는 영어가 유색인종에게 아픔을 주는 도구로도 쓰였어요. 일종의 무기화랄까요?

영어를 그냥 받아들이진 않았군요.
영어라는 언어를 알지 못하면 세상의 공식적이고 역사적인 서사에 속하지 못한다는 것을 느꼈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소외된, 비영어권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의 중요성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제시 천의 작품 속 언어들은 해체와 분절을 통해 ‘읽히지 않는 상태’에 놓이죠.
맞아요. 저는 그 불투명함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싶어요. 새로운 의미, 기호학, 생각, 시간이요. 저는 흑과 백같이 이분법적으로 나뉜 세상의 틀에 여러 우주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런 제게 시학은 명확하진 않지만 아주 중요한 소통의 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제시 천, 〈시: concrete poem〉, 2023. 흑연, 손으로 자른 한지, 나무 프레임. 각 158.75 × 91.44 × 6.35 cm(3점). 도움주신 분: 이창욱.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제작 지원. 작가 제공.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이것 역시 지도》 전시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2023.09.21-11.19. 사진: 글림워커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맞아요. 시는 명시적으로 의미 파악이 어렵고, 함축적이고, 또 어떤 언어로 쓰이냐에 따라 그 뉘앙스가 크게 달라지는 가능성이 많은 언어라고 생각해요. 여러 작품에 시적인 요소가 참 많던데요.
저는 비주얼 아티스트로서 시를 ‘만들어요’. 그래서 제게 시는 언어 그 이상이죠. 제 작품에서는 시가 언어와 이미지, 사운드, 영상, 빛, 드로잉, 조각, 공간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시가 되는 작업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인이자 탈식민주의 이론자였던 에두아르 글리상Edouard Glissant이 <관계의 시학A Poetics of Relation >이라는 책에 시학과 불투명함의 중요성에 대해 서술하기도 했는데, 그의 이야기처럼 시는 세상의 명확한 권력과 의미에 저항하는 것, 생성하는 것, 그리고 아름다움인 것 같아요.

그런데 작가에게 시적인 것은 무엇인가요.
‘지금’ 그리고 ‘존재’라는 것을 더 의도적으로 보게 해주는, 그리고 여러 가지 관점을 열어주는, 포털 같은 것 같네요.

작업이 보다 입체적으로 느껴지네요.
저는 시라는 공간이 우리의 영혼에 있어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 공간을 여는 작업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요.

지금과 같은 작업은 언제 구체화됐나요?
언어에 관한 작업은 2014년부터 꾸준히 해왔는데, 2020년부터 제 작업이 보다 단단해졌다고 느껴요. 팬데믹 시기 뉴욕에서는 아주 심한 인종차별과 그것에 대한 대항의 시간이 있었어요. 저와 같은 이주민에게는 특별히 더 어려운 시간이었고요. 그 시기에 인종, 나라, 권력이라는 국경을 넘는, 언어의 무한한 가능성과 시학을 더 찾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그래서 지금과 같이 보다 시적인 작업을 하게 됐죠. 2020년부터의 작품은 더 철학적이고, 영적이고, 솔직하게 나온 것 같아요.


제시 천, 〈새로운 달들에 대한 노트들(a reader); 새로운 달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나의 할머니 이옥선, 법명 정각행의 노트들; 역사에 대한 다른 노트들; 나의 답장들 - 같이 말하기에 대해서 -〉, 2023. 5개의 보면대 위에 손으로 쓴 일기, 여러 장의 편지, 사진, 아크릴 패널, 클립, 돌. 가변 크기.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제작 지원. 작가 제공.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이것 역시 지도》 전시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2023.09.21-11.19. 사진: 글림워커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제시 천, 〈오 더스트〉, 2023. 3채널 비디오 설치, 3개의 거울. 7분 6초(비디오), 사운드; 가변 크기(설치). 현지 제작: 조재홍, 염철호, 정진욱.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제작 지원. 작가 제공. 제12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이것 역시 지도》 전시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2023.09.21-11.19. 사진: 글림워커스.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번 전시 <시, language for new moons>에서도 알 수 있듯 작품에서 달을 모티브로 한 작품들이 더러 등장하더라고요. 작가에게 ‘달’은 어떤 상징인가요.  
달은 제 작품에서 시적, 은유적 표현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현재와 미래의 여러 나라들이 식민화하려는 곳colonial site이기도 하죠. 제가 생각하기에 아무리 인간의 권력과 욕망이 지배하려 해도, 달은 자기만의 경이로움을 가지고 나아가는 아름답고 신비로운 존재 같아요. 그리고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은 인간들에 진실된 공통어common language 아닐까요.

현재 탐구하는 주제로 어디까지 나아가고 싶나요.
항상 언어라는 주제를 탐구해 왔고, 쭉 그럴 생각이에요. 저에게 ‘시간’이란 것이 주어진 동안 계속.

지금 작가에게 가장 유효한 질문 한 가지가 있다면요.
“오늘을 어떻게 보고 있나?”요.(웃음)

 

Text Kwon Sohee
©Courtsey of Jesse Chun, Jimi Park, Seoul Museum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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