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나는 죽었다. 육준서의 파괴가 시작됐다.

DEMOLITION

Text Oh Yura

해가 머리 위로 직선으로 내리쬘 때 묘한 쾌감이 든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햇빛이 너무 뜨거워’ 총을 쏘았다고 말한다. 장마가 끝난 뒤 뙤약볕이 엔도르핀 과다 분비를 일으키는 건 아닌지, 그날도 원인 모를 형이 상학 현상에 의구심을 품던 찰나였나. 총 67개의 혀로 이뤄진 육준서의 ‘은근’이 총살당했다.
육준서가 행한 이 ‘파괴’는 현실과 메타버스의 간극을 좇고, 상반된, 아니 한층 다면적인 매개체에서 새로운 어젠다를 구축하려는 작가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스스로 갈등을 조장하고, 노선을 입체적으로 설계하며, 이를 또 사격이라 는 궁극의 기행으로 뽐내는 일, 그러니까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는 행위. 즉 인 위적으로 엔트로피를 증대시켜야만 무질서 속에 새로운 질서를 확립할 수 있는 법이다. 그의 파괴에 무한한 축복을 보내며 동시에 ‘부활’이라 다시 쓴다.

1년여 만에 다시 만났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며 무의식 적으로 든 생각은.
해야 할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동시에 하려니 도통 여유가 없다. 인천에 살면서 서 울에 갈 때마다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간발의 차로 놓칠 뻔한 버스를 겨우 잡아타 고는 숨을 고르는 모습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매일 그런 하루를 보내는 것 같다는 의문스러움. ‘아찔하다’, ‘위태롭다’, ‘아슬아슬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까.

일상의 자극 같은 상황을 의도적으로 즐길 때도 있다. 아닌가.
맞다. 뭔가 버스를 그렇게 타면 기분이 좋지 않나. 하루가 잘 풀릴 것 같은 생각 과 그런 느낌.

지금부터 그 불안정의 미학을 함께 만끽해 보자. 이제부터는 육준서가 ‘은근’이라 는 자신의 작품(왁스와 돼지 뼈를 한데 섞고, 혀 속에 집어넣은 작품)에 총구를 겨 누고 파괴한 기행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작년 11월에 이 작품을 NFT로 발매했 고, 실물 작품 또는 NFT 소유권에 대한 선택권을 구매자에게 넘겼다. 데이미언 허 스트 역시 ‘The Currency’란 작품을 같은 방식으로 판매했으나, 그 이전에 당신 이 먼저 행했다. 이 방법은 어떻게 탄생했나.
쉽게 설명하자면, 디지털로 변환된 이미지를 대체 불가능하고 고유한 작품으로 설계해 보자 하는 결심에서 시작했다. ‘은근’은 실물과 NFT 작품이 동등하게 두 형태로 존재한다 생각하면 된다. 나는 이 두 가지를 각각 만들었고, 먼저 대중에 게 NFT로 받을 수 있는 코드를 부여한 뒤(이 또한 특이하게 오프라인으로 판매 했다), 한 달 뒤에 실물 작품과 NFT의 그것 중 선택할 수 있게 설계했다. 이 의 도는 NFT의 불안정한 속성, 허점에서 출발했다. 그간 행해온 미술의 문법과 새 롭게 각인되는 속성을 합쳐둔 결과물이라 할 수 있겠다.

사격하는 모습을 보며, 당신에게 가장 익숙하지만 예술가로서는 아무나 취할 수 있는 행위가 아니기에 좀 특별했다.
군인이던 과거, 그리고 특수부대 부대원의 경험을 갖고 있는 건 미술가로서 타 인과 비교될 수 없는 지점이다. 훈련받으며 죽을 뻔한 고비도 경험하고, 매일같 이 한계를 갱신했다. 그래서 대개는 도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편이다. 하고 싶고 해야 할 것들을 강하게 밀어붙이니까. 행동을 위한 강한 원심력은 군 대에서 견고히 굳어진 것 같다.

수십 개의 총알이 관통한 ‘파괴’는 또 무슨 의미인가.
작품의 마지막 단계인 ‘파괴’를 행하며 어쨌거나 의미 있는 과정을 경험했다. 가끔 난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단 생각에 내 작품임에도 쉽사리 정이 안 들었다. 한데 깨지 고 부서진 걸 보니 애틋함에 사로잡혔다. 더 새로워지기 위해 필요한 과정이었지.

동의한다. 실험 자체에 의의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구매자 중 70%는 NFT 작품을 선택했는데, 예상했던 부분인가.
나 역시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작업을 한창 전개할 당시 NFT에 관한 기대심리 나 시장 상황, 속된 말로 거품이라고 표현하는데 당시는 제일 극한을 달릴 때여서 메 타버스형 작품을 선택한 사람이 다수라 예상했다. 시장의 흐름과 딱 들어맞았다.

오늘 행한 ‘파괴’ 퍼포먼스는 ‘은근’이 구현된 ‘테라월드’의 붕괴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테라월드가 붕괴되지 않았다면, 파괴는 어떤 행위로 대체됐을까.
NFT 시장에 굉장히 큰 변화가 올 거라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과열된 상 태였고, 가상화폐 원리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안정적일 수 없거든. 그런데 일종의 제휴를 맺고 프로젝트를 전개한 테라월드에서 터질 거란 건 생각지 못한 거지. 신 기하고 놀라운 경험이었다. 설령 체계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도 나는 이 작품을 파 괴할 생각이 있었고, 또 다른 방안을 고심했을 거다. 관객이 주체가 되어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 있으려면 파괴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였으니까.

작품을 완성하고, 스스로 파괴하고, 이는 또 다른 작품으로 부활한다. 동양의 윤회 사상과 무척 닮았는데, 왜 이런 방법을 취하게 되었나.
윤회사상이라 설명하기엔 조금 거창하다. 내 방식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지 않 는데, 좀 더 다면적인 설계를 거쳐 작업하는 건 맞지만 이 또한 절대적인 것이 아 니라 허점이 존재한다. 먼저 실리적인 부분과 맞닿은 지점이라 설명할 수 있는데, 데이미언 허스트는 불태우고 끝이다. ‘은근’은 내 첫 장기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NFT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며, 내겐 남다른 의미가 있다. 동시에 이걸 구매한 사 람들에게도 단순히 투자 논리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에 대한 가치를 이해 할 수 있는 척도로 남길 바라는 마음이 강조됐으면 한다. 더 이상 파괴되지 않아도 한 번 파괴된 잔여물로 의미 있는 작품을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다.

파괴의 과정은 다시 영상으로 기록되어 그 소유권을 가질 수 있다 말했다. 작품이 이토록 유기적으로 변화하고, 그걸 기록해 다시 새 생명을 얻고, 그 기저에는 NFT 라는 플랫폼이 있었기에 증폭될 수 있었다고 본다.
그럴 것이다. 파괴한 뒤 작품 하나씩 모두 복각했다. 그 과정을 사진으로 다시 기록했는데, 이것들과 파괴된 영상의 구성이 NFT 구매자들에게 되돌아간다. 그 이후에 판매되고 트래킹되는 방식은 바뀌겠지. 현시대의 작업자로서 NFT 예술 은 한 번쯤 거쳐야 하는 과정이고, 그 흐름을 똑바로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으 면 하는 바람에서 시작된 프로젝트다.

결국 작품을 빌려 소통한 것이라 볼 수 있겠지. 최근 무인양품과의 협업도 오프라 인 전시 이전에 디지털 전시회를 통해 선공개했다. 소통은 무슨 의미인가.
소통은 늘 좋다. 불친절함을 느끼는 순간 불쾌하지 않나. 사람 간 대화에서만 소통 을 느끼는 게 아니고 뭔가를 듣거나 보거나 교감하는 순간의 힘을 믿는다. 예술도 똑같다. 소통이 원활하지 않다 느낄 땐 고민에 빠진다. 그간 내 작품을 통한 소통 도 아직까지는 이걸 알아달라고 표현하는 것에 그치는 감이 없지 않거든.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은 분명 더 좋은 게 있을 거 같다. 효과적인 방법을 모색 중이다.

결정적으로 NFT와 현실의 예술이 모두 공존해야 한다. 예술가는 이를 자유자재 로 활용해야 하는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NFT도 그렇고 기존 갤러리도 그렇고, 원래 있던 양상과 새롭게 대두되는 환경, 그리고 NFT 이후에 뭐가 나올지 모르지만 계속 출현하는 다면적 매개체를 활용 하는 데 작가는 자기복제처럼 하던 방식을 고수할 게 아니라 포맷의 특성에 맞 춰 구성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함을 자각해야 한다. 꾸준히, 끊임없이 고민하 는 자세가 필요하다.

당신이 언급한 대로 ‘은근’은 NFT 예술의 ‘고유성’이 집약된 결과물인가. ‘가치’는 눈에 보이지 않고, 값으로 매길 수도 없다. 그러나 NFT가 등장하며 가치를 의도적 으로 기록하는 데 집착하고, 값은 때때로 기하학적 수치를 얻었다. 젊은 예술가로 서 예술의 가치, 경험 그리고 소유권에 대한 방향성이 기성세대와 다를 것 같다.
현실 속 예술 작품은 그 자체로 ‘고유성'을 띠지만 ‘상징성’이 강조되는 NFT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지 의문점이 들었다. 코드에 의존하는 NFT에서 한 단계 발 전해 그 가치를 어떻게 증명할까 고민을 거듭했고. 하지만 NFT가 등장하기 이전 에도 예술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되었다.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지. “예술은 무한한 돈의 흐름이다.” 그것이 한 사람의 견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예술이 실 제 이상의 가치를 지니는 건 시장경제의 원리에 따라 돈으로 환산 할 수 있기 때문 이다. 예술품이 얼마에 팔렸다는 가격 생성의 흐름은 몇천 년 전부터 존재하던 일 이니까. 덧붙이자면, 무라카미 다카시가 “예술가는 사업가”라고 했는데 자기 자신 이 콘텐츠를 창출한 뒤 그걸 판매해 돈을 벌고, 그렇게 예술은 사업 형태를 띤다. 예술은 생각보다 고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육준서는 계속해서 독자가 쉽게 미술에 접근해야 함을 강조했다. 당신이 예술의 언어로 이루고 싶은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인가. 
그간 행해 온 내 방식이 쉽진 않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더 직관적인 미술 형태를 고민해 볼 참이다. 그런 걸 보완해 직설적 작업을 만들고, 어떤 시도든 해볼 참 이다. 나는 어릴 때 누가 시키지 않아도 뭘 만들고 그랬다. 다 먹은 요구르트병 을 자르고 붙여 로봇을 만들고, 해가 지난 달력 뒷면에 낙서했는데, 그것의 연장 선상에 존재하는 것 같다. 예술을 하는 별다른 이유가 있어서 하기 보다는 자연 스럽게 하고 있었던 거고, 그것에 직업 의식이 생겨 의미 있는 걸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당연히 하는 것.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건 아직 없고 당장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건 지속적으로 고민해 볼 문제다.

Text & Photography Oh Yura
Art Lee Jaed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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